은혜/간증나눔
다준학교 10기 이선우
다준학교
작성자
이선우
작성일
2022-11-30 04:52
조회
57
9기 다준을 마치고 10기 다준을 시작하기 이전까지 저에겐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앙생활의 침체기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9기를 수료하며, 깨달았던 것이 많아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10기는 무슨 앞으로는 훈련 안받아도되겠다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갔지만, 그 당당함은 얼마 못가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삶의 전반에서 무너지는 저의 모습은 수습하고자하면 더 처참하게 내려앉아갔습니다.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한번 10기는 안듣겠다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라는 똥고집으로 인해 머뭇거리다가 이후 일련의 사건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질문하시는듯하여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해 다준10기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1 “너, 뭐 때문에 열심을 내고 있니?”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저는 늘 열심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학생으로 있을 때에나 청년으로 있을 때에나, 사역을 했을 때에나 전 늘 열심을 다 하였습니다. 처음엔 하나님을 믿는게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게 삶 곳곳에서 느껴져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생겨나는 열정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역을 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는 ‘나’가 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나’의 것을 지키려고 열정을 쏟는 ‘나’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련의 사건과 말씀을 통하여 “넌, 지금 어디에 열정을 쏟고 있니?”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단순히 나의 것을 지키기위하여 아니 인정받기 위하여 나의 일에 열정을 쏟고 있었던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질문은 저의 전반의 신앙생활을 하나님께 따지듯 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준 시작과 동시에 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사역하고, 섬기고 했던 모든 것들이 다 나의 욕심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답이 없으셨다. 그런데 그 주 다준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묵상을 통해 계속 저랑 오버랩 시키는 인물이 있었다. 사울과 압살롬과 가룟 유다였다. 그들 모두다 처음에는 순수한 열정,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현실을 보았고, 자신의 위치를 보았고, 자신의 문제를 보았던 그들은 한없이 자신의 인정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이들이었다. 다준 일주일 마지막 금요일 저는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가 사울이었고, 가룟유다였고, 압살롬이었네요. 죄송해요.” 이후 하나님께서는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동안 답을 안하셨던 하나님, 아니 사실 답해주셨지만 듣지 않았던 저였죠. 여튼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 선우야, 너가 사울맞아, 너가 유다가 맞고, 너가 압살롬이 맞아 그들의 처음이 진심이었지만, 나중에는 아니게 된것처럼 너도 맞아. 그런데 난 그런 너를 사랑한단다.” 이후 다준 2주차를 맞이하는 저에겐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나의 질문1 “어떻게 이런 저를 사랑하실 수 있나요?”
1주차가 지난 시점 저는 매우 눌렸습니다. 이런 배반자, 반란자를 그래도 사랑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그 누구도 이선우를 사랑하지 못할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저이기에 아니 애초에 난 사랑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한 저였기에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게 이해가 안되었고, 더나아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존재를 향하여 내가 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의 사랑은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를 지키기위해 나의 바벨탑을 세우기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저에게 하나님은 다준 2주차 아니 더 길게 “널, 사랑한다”라고 하며, 저를 만지려고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만지심에 이 사랑 납득이 안가 회피하기 시작합니다.
회피하는 ‘나’
3주차에서 6주차까지 전 도망치느라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납득도 안가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일이 하나님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는 죄책감이 너무 힘들고,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는게 죄스럽고 하여 그냥 도망쳤습니다.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다준도 십벗을 핑계삼아 땡땡이치기도 하였습니다. 리더들의 말을 쌩까기도 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싫어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다준간사님을 통하여 이야기해주셨고, 셀장님을 통하여 말씀해주셨고, 찬양팀원들을 통하여 말씀해주셨고, 다준조원들, 다준 사감님들 등 많은 이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넌, 사랑받는 존재야”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혼란의 시기 가운데 자아상을 맞이하였고, 내가 하나님을 지금까지 잘못 믿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떤 액션을 사랑하시는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거고 나는 그 사랑에 무슨 행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라 그냥 누리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후 이상하게 모든게 달라집니다. 모든 이의 말이 그저 감사하고 좋게만 받아집니다. 나를 훈계하는 것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져 그저 감사한 하루 하루 이렇게 다준 8주과정은 마무리됩니다.
굳건해지는 사명
다준 8주의 과정을 지나면서 저는 내면의 왜곡된 감정과 잘못된 방향을 회복시키는 시간을 보냄과 동시에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명이 굳건해지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사역의 대상과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잡혔으며, 잔가지가 쳐지니 일전에 늘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일전에는 “하나님, 왜 날 지금까지 이끌어오시다가 지금 이순간 여기서 방치하고 계시는가요?”라는 질문을 하였다면, “하나님, 지금 이 시간 가운데 나를 통해 내가 어떤 영혼을 품는 사역을 하여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심에 감사합니다”라는 답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지”라는 어떻게보면 대단한 믿음의 고백같은 이 말이 무지의 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주의 강의를 통해선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흔들리는 나의 정체성 가운데서 명확한 기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기준이 세워졌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해야한다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2주차에는 나의 죄성이 다루어졌으며, 사명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속 나의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했음을 잠시들여다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욕심으로 사명을 대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철저히 하나님께 무릎꿇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주차~4주차는 저의 사역의 영역이 명확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당장에 내가 처한 상황에서 회복되어 이 상황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역자, 상처입은 치유자의 자리에 저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5주차~6주차는 그러기 위해선 너부터 회복되어야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7~8주차는 저의 삶에 적용시키는 단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를 고민하였고, 적용점을 찾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준을 마치며...
다준을 마치며,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그저 이 시간을 버리는 시간으로 보낼지, 아니면 이 시간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할지. 저는 후자의 답을 정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몇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내년 교육학과 관련하여 야간대학원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일반사회학 중등교육학으로 준비하고자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바이블키를 들으며, 성경을 배우고자 합니다. 다음으론 일주일에 책 한권을 읽고자합니다. 분야는 다양하게 점차 저가 전공한 분야가 아닌 곳까지 넓혀가고자 합니다. 이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건 저의 시야는 다시 한길로 좁혀진듯하다는 것입니다.
(감사)
다준기간 동안 우리를 말씀으로 이끌어주신 담임목사님과 강사님들, 맛있는 저녁으로 섬겨주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다준간사님과 사감님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질문1 “너, 뭐 때문에 열심을 내고 있니?”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저는 늘 열심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학생으로 있을 때에나 청년으로 있을 때에나, 사역을 했을 때에나 전 늘 열심을 다 하였습니다. 처음엔 하나님을 믿는게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게 삶 곳곳에서 느껴져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생겨나는 열정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역을 할 때, 하나님께 묻지 않는 ‘나’가 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나’의 것을 지키려고 열정을 쏟는 ‘나’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련의 사건과 말씀을 통하여 “넌, 지금 어디에 열정을 쏟고 있니?”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단순히 나의 것을 지키기위하여 아니 인정받기 위하여 나의 일에 열정을 쏟고 있었던 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질문은 저의 전반의 신앙생활을 하나님께 따지듯 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준 시작과 동시에 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사역하고, 섬기고 했던 모든 것들이 다 나의 욕심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답이 없으셨다. 그런데 그 주 다준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묵상을 통해 계속 저랑 오버랩 시키는 인물이 있었다. 사울과 압살롬과 가룟 유다였다. 그들 모두다 처음에는 순수한 열정,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현실을 보았고, 자신의 위치를 보았고, 자신의 문제를 보았던 그들은 한없이 자신의 인정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이들이었다. 다준 일주일 마지막 금요일 저는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가 사울이었고, 가룟유다였고, 압살롬이었네요. 죄송해요.” 이후 하나님께서는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동안 답을 안하셨던 하나님, 아니 사실 답해주셨지만 듣지 않았던 저였죠. 여튼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 선우야, 너가 사울맞아, 너가 유다가 맞고, 너가 압살롬이 맞아 그들의 처음이 진심이었지만, 나중에는 아니게 된것처럼 너도 맞아. 그런데 난 그런 너를 사랑한단다.” 이후 다준 2주차를 맞이하는 저에겐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나의 질문1 “어떻게 이런 저를 사랑하실 수 있나요?”
1주차가 지난 시점 저는 매우 눌렸습니다. 이런 배반자, 반란자를 그래도 사랑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그 누구도 이선우를 사랑하지 못할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저이기에 아니 애초에 난 사랑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한 저였기에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게 이해가 안되었고, 더나아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존재를 향하여 내가 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의 사랑은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를 지키기위해 나의 바벨탑을 세우기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저에게 하나님은 다준 2주차 아니 더 길게 “널, 사랑한다”라고 하며, 저를 만지려고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만지심에 이 사랑 납득이 안가 회피하기 시작합니다.
회피하는 ‘나’
3주차에서 6주차까지 전 도망치느라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납득도 안가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일이 하나님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는 죄책감이 너무 힘들고,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는게 죄스럽고 하여 그냥 도망쳤습니다.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다준도 십벗을 핑계삼아 땡땡이치기도 하였습니다. 리더들의 말을 쌩까기도 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싫어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다준간사님을 통하여 이야기해주셨고, 셀장님을 통하여 말씀해주셨고, 찬양팀원들을 통하여 말씀해주셨고, 다준조원들, 다준 사감님들 등 많은 이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넌, 사랑받는 존재야”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혼란의 시기 가운데 자아상을 맞이하였고, 내가 하나님을 지금까지 잘못 믿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떤 액션을 사랑하시는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거고 나는 그 사랑에 무슨 행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라 그냥 누리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후 이상하게 모든게 달라집니다. 모든 이의 말이 그저 감사하고 좋게만 받아집니다. 나를 훈계하는 것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져 그저 감사한 하루 하루 이렇게 다준 8주과정은 마무리됩니다.
굳건해지는 사명
다준 8주의 과정을 지나면서 저는 내면의 왜곡된 감정과 잘못된 방향을 회복시키는 시간을 보냄과 동시에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명이 굳건해지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사역의 대상과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잡혔으며, 잔가지가 쳐지니 일전에 늘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일전에는 “하나님, 왜 날 지금까지 이끌어오시다가 지금 이순간 여기서 방치하고 계시는가요?”라는 질문을 하였다면, “하나님, 지금 이 시간 가운데 나를 통해 내가 어떤 영혼을 품는 사역을 하여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심에 감사합니다”라는 답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지”라는 어떻게보면 대단한 믿음의 고백같은 이 말이 무지의 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주의 강의를 통해선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흔들리는 나의 정체성 가운데서 명확한 기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기준이 세워졌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해야한다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2주차에는 나의 죄성이 다루어졌으며, 사명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속 나의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했음을 잠시들여다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욕심으로 사명을 대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철저히 하나님께 무릎꿇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주차~4주차는 저의 사역의 영역이 명확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당장에 내가 처한 상황에서 회복되어 이 상황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역자, 상처입은 치유자의 자리에 저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5주차~6주차는 그러기 위해선 너부터 회복되어야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7~8주차는 저의 삶에 적용시키는 단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를 고민하였고, 적용점을 찾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준을 마치며...
다준을 마치며,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그저 이 시간을 버리는 시간으로 보낼지, 아니면 이 시간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할지. 저는 후자의 답을 정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몇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내년 교육학과 관련하여 야간대학원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일반사회학 중등교육학으로 준비하고자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바이블키를 들으며, 성경을 배우고자 합니다. 다음으론 일주일에 책 한권을 읽고자합니다. 분야는 다양하게 점차 저가 전공한 분야가 아닌 곳까지 넓혀가고자 합니다. 이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건 저의 시야는 다시 한길로 좁혀진듯하다는 것입니다.
(감사)
다준기간 동안 우리를 말씀으로 이끌어주신 담임목사님과 강사님들, 맛있는 저녁으로 섬겨주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다준간사님과 사감님들 감사합니다.